실학자 정약용과 성리학의 사상jo인문사회레포트

11 min read
25 September 2022
실학자 정약용과 성리학의 사상jo인문사회레포트
다산의 부친 정재원은 진주목사로 재직하던 이듬해(1792년)에 진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마을에서 나온 장흥 위씨의 고문서와 목판, 유고 등 생활유물 수백 점이 전시돼 있다. 죽헌고택은 안채로 향하는 아기자기한 돌계단이 정겹다. 의학서적 마과화통은 천연두에 대학 지식을 체계적인 정리를 해놓은 의학실천 교본이다.
영덕군 강구면에 소재한 오션비치 골프&리조트가 19일 체육시설 운영에 써달라며 5인승 골프용 카트 2대를 영덕군 시설체육사업소에 기증했다. 이번에 기증된 카트는 오션비치 측에서 2012년 350만원 가량에 구입한 것으로 내구연한은 15년이다. 오션비치 골프&리조트 조재관 대표는 “이번 기증에 그치지 않고 영덕군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여력이 닿는 데까지 적극 협조하겠다”고 전했다.
또한 다산 자신의 저서를 후세에 전해달라는 전언과 함께 저술의 과정과 원칙을 정제해 제시하고 있어, 다산 사상의 큰 줄기를 압축해놓은 글로 읽기에 유익하다. 정약용이 유배 시기 절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들을 엮은 이 책은 대학자 이전의 인간적인 다산의 면모를 만날 수 있어 오늘날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이트의 콘텐츠는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바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1789년 식년문과 갑과 시험에 합격해 ‘가주서’라는 벼슬을 받은 그는 강에 놓을 다리의 설계도를 작성해 정조 임금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지니까 이를 시기하는 공서파들이 정약용이 서학을 믿는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공서파의 공격에 정조도 하는 수 없이 정약용을 충청남도 한 작은 고을인 해미로 귀양을 보냈다.
약용은 청나라에서 들어온 성을 쌓는 기술이 적혀 있는‘기기도설’이 적혀 있는 ‘고금도서집성’이라는 책을 읽으며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그는 서양식으로 쌓는 ‘수원성제’라는 글을 써서 정조에게 바쳤다. 진주성 촉석루 옆 논개 사당 의기사(義妓祠) 편액에 다산 정약용의 의기사기(義妓祠記)도 걸려있다. 의기사가 창건된 지 40년이 지난 뒤인 1779년 진주병사 홍화보(洪和輔)에 의해 한차례 중수(重修)를 하게 된다. 이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의기사 기문(記文)이 처음으로 작성된다.

다른고객님들이 함께 구매하신 상품


기타 기준 사항구매자가 미성년자인 경우에는 상품 구입시 법정대리인이 동의하지 아니하면 미성년자 본인 또는 법정대리인이 구매취소 할 수 있습니다. 한국관광공사에 의해 창작된 은(는) 공공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실학자정약용,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다실학자 가운데 다양한 방면에 탁월한 개혁 사상을 가진 사람이 정약용이다. 그는 정치 기구의 개혁과 행정 제도, 노비제, 교육 및 과거 제도의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특히 농민에게 토지를 경작하게 하고, 노동량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사회를 보는 관점이나 문제의 해결 방안에서는 실학자마다 서로 달랐다.
1805년 겨울은 승려인 아암(兒庵)의 배려로 아들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지냈다. 1806년 가을에는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본 사이트에 게재된 모든 기사의 판권은 본사가 보유하며, 발행인의 사전 허가 없이는 기사와 사진의 무단 전재복사를 금합니다.Copyright ⓒ (주)SRB 무등일보 한국블로그 reserved. 다산의 편지를 보면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선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810년 다산이 강진에서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중 "뽕나무를 심어라"라는 내용이 있다. 다산은 “생계를 꾸리는 방법에 대해서 밤낮으로 생각해도 뽕나무를 키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며 제갈공명이 은거할 때 뽕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꾸려간 게 큰 지혜임을 깨달았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실학에 뛰어나 한강 배다리, 주교(舟橋)를 설계하고 1792년엔 수원 화성(華城)을 설계, 1794년 무거운 짐을 옮기는 기중기를 만드는 등 과학방면에 탁월하였다. 『교과서 저학년 위인전 시리즈』는 열정과 노력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위인들의 일생을 재미있게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기존 위인전처럼 연대기 순으로 내용을 요약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동화로 각색하였습니다.

"부자에게 세금 제대로 거둬야" 정약용보다 시대를 앞선 실학자


아무리 풍부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아이라도 내용만 기억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큰 학습 효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교과서 저학년 위인전 시리즈』에는 위인 동화를 모두 읽고 나면 논리력과 사고력을 확장할 수 있는 ‘읽으며 생각하며’ 코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읽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을 배우고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아이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이들이 직접 문제를 풀고 나서 자신의 생각과 비교해 볼 수 있고,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지도할 때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추사는 두 번째 아내인 예안(禮安) 이씨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인부들은 거중기를 이용해 10t 이상의 무거운 돌을 높은 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엽전 1문이나 2문을 아끼라는 건 지금으로 치면 1000원, 2000원을 아끼라는 말이다. 작은 돈을 아껴야만 종자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모은 엽전 열 꿰미는 장롱 안에 고이 모셔둘게 아니라 뽕나무를 심을 땅을 사거나 물건을 사서 장사하는 데 써야 한다. 다산의 말을 곰곰이 씹어보면, 작은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큰 돈을 아끼지 않고 과감하게 투자하는 일이다.

최근 본 상품


온 힘을 다해 자식을 키웠지만 함께 있지 못한 원죄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다산도 함께 하지 못하는 아빠의 원죄를 인정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았다. 그는 상황에 따라 먼저 보내기도 하고 자식의 답장을 보고 훈계를 하기도 하고 아니면 소식을 전해 듣고서 염려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철학적으로 매우 미묘한 주제를 다루는 「제물론齊物論」은, 『장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기에 부활한 정약용, 대한민국을 리셋하다


다산은 이때도 촉석루에 올라 진주의 산수(山水)와 연운(煙雲)을 감상하고 악공과 기녀를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한 늙은 기생이 일어나 춤을 추고 나서 칼을 던지고, 다산 앞에 다소곳이 꿇어앉아 술잔을 권하면서 “인생의 환락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술을 드시고 여러 기생을 위하여 시를 지어 이 자리를 빛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요청하게 된다. 다산은 함께 합석한 절도사의 권유도 있어 시 한 수를 지어 기생들에게 명하여 시를 노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남긴 시가 ‘촉석루에 다시 올라 노닐다(重遊矗石樓)’ 였는데 또한 일부를 소개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곳, 우리의 전통과 민속이 살아있는 곳으로 간다.
그는 유배 18년 동안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 경전주석 232권과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경세론 저술에 매달렸다. 수기를 통해 치인에 이르러야 선비의 임무가 완성된다고 본 것이다. 정약용은 힘든 유배 생활 속에서 두 아들에게 희망과 깨우침을 편지에 담아 보내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는 8대 옥당(玉堂, 홍문관)을 지낸 명문가가 자신 대에 이르러 폐족(廢族)이 됐음을 두 아들을 향해 선언한다.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聖人)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되지 못하겠느냐? 그는 환정과 군정의 폐단 등 농민의 어려운 현실을 목격하고 자세히 보고했다.
생전예수재는 단순히 내생의 공덕을 위한 의식이 아니라 불도(佛道)의 실천이 요구되는 수행의 의례이다. 본 연구는 인식 능력을 개념 차원과 실제 교육의 과정에서 작용하는 차원에 초점을 두고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첫째, 지각은 본체인 지(智)에 의거해서 나오는 양(陽)의 기(氣)로 대상을 인지하는 작용이다. 둘째, 분별은 지(智)에 의거한 백(魄)의 기(氣)로 사물을 판별하는 작용이다. 셋째, 사고는 성(性)에 의거한 혼(魂)의 기(氣)로 인해 사물을 탐구하는 작용이다.

원문 보기 안내


실학꼬마바자회도 열렸고, 자신의 별자리를 말하면 손에 별자리 그림을 레이저 프린팅으로 새겨주기도 했다. 목민(牧民)이란 법을 지켜가며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공익에 봉사한다는 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민(民)이 주인이 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의 공부는 더욱 절실하다. 구독기관 조회하기 소속기관이 없으시거나 구독하지 않는 기관 소속이실 경우 논문을 구매하셔야 합니다. 도서관의 ‘원문복사 서비스’를 통해 원문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에 사는 정약용의 외조부 윤두수의 집에는 수천 권의 책이 있었는데 정약용은 책 읽기를 좋아해 윤두수의 집에 자주 갔다. 어떤 때에는 나귀에 책을 잔뜩 싣고 집으로 오기도 했다. 정약용은 매형 이승훈을 통해 그의 외삼촌인 이가환과 자주 어울렸다. 권의 책이라도 초서법을 통해서 열흘 동안 공부한다면 충분히 그 내용을 다 익힐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필사는 과거 책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책 한 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었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쓰던 공부법이다.

이벤트 정보입력 및 이벤트 참여 동의


정약용이 예순이 되어 그의 일생을 돌아보며 직접 쓴 묘지명에서 소개한 호는 사암(俟菴)이다. 사암은 ‘초막에서 기다린다’는 뜻인데,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그의 삶과 사상을 후손이 평가해주길 기다린다는 뜻이다. 목민심서 낭독회를 비롯해 사회봉사에 힘쓴 시민들을 위한 시상식까지 열려 다산의 뜻을 되새겼습니다. 따라서 맹자의 의리지변을 분석하는 것은 맹자 사상의 핵심을 이해하는 관건적인 작업일 뿐 아니라, 유가의 도덕 선택 이론의 핵심을 이해하는 일이다. ※ gmail(지메일) 계정은 시스템상의 문제로 발송 오류가 잦으니 gmail 이외에 메일로 신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인식 능력은 개념 차원에서 '지각', '분별', '사고'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교육의 과정에서는 다양한 인식 능력을 종합적으로 발휘한다. 어른을 공경하는 행동을 익힌 학습자는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모습을 본 경험과 접목시키는 '사고'를 하다가 그것이 예의에 어긋난 잘못임을 '분별'하고 곧장 마음의 천리를 '지각'해야, 몸소 실천하는 수준까지 이른다.

정약용은 강진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자식 교육이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옆에 있어도 자식이 엇나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아비가 자식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가문을 청족(淸族)에 상대되는 폐족(廢族)에 바라보는 상황에서 ‘자식의 공부’는 단순히 학업 성취가 아니라 가문의 성쇠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었다. 19세기 문인관료 이유원(李裕元)이 지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강진 보림사의 죽전차(竹田茶)는 열수 정약용이 얻어냈다.

우리는 진정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는가


노년에 이르러 작은 술잔 하나를 만들어 입술만 적셨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 마시는 법은 물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써야 하는지도 일러준다. 18년의 유배를 끝내고 57세 초로의 나이에 자유의 몸이 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젊은 나이에 죽은 며느리 무덤을 먼저 둘러봤다. “시아버지 섬기기 1년뿐이니 나는 그 어짊을 알지 못하나/ 시어머니 섬기기 17년이라 시어머니는 너를 두고 예쁘다 하네.” 며느리 심씨는 다산의 둘째 아들 학유의 아내로 1800년 봄 열네 살에 시집왔다. 그해 여름 정조가 승하하고 다음 해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됐다.
비록 그 당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예악은 붕괴했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에서 사상 문화가 가장 휘황찬란하게 발전을 이룩하던 시대였다. 이 시기 제자백가의 출현으로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새로운 국면이 나타났으며, 그것은 중화 문명의 정화를 구성했다. 따라서 이 시기 문화 사상은 전반적인 봉건사회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나아가 중국 고대 문화 발전에 매우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공자를 대표로 하는 유학 사상은 그 후 중국 봉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주류 사상이 되었으며, 그 유학적 가치 체계는 봉건 사회질서를 수호하는 과정에서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 아픔을 이겨내고 시대의 최고 지식인으로 자리매김되다니, 정녕 위대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합니다. 27일 경기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주제발표에 나선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산 정약용이 18년 유배생활간 아들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그의 교육철학을 설명했다. 수원 화성을 한 바퀴 둘러보려면 족히 3시간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서장대(西將臺)가 있는 곳을 제외하면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산책하듯 돌아볼 수 있다.
텍스트가 아닌 영상으로 만나게 될 ‘대통령 정약용’은 어떤 느낌일지 정말 궁금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배우 김승우가 TV영화 ‘대통령 정약용’(연출 이홍석/ 극본 방봉원)을 통해 데뷔 이래 처음으로 사극 장르에 도전한다. 김승우는 "지난해 원작 소설을 읽고 관심을 가지던 차에 극본을 받았다"며 "이야기에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텍스트가 아닌 영상으로 만나게 될 대통령 정약용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고 했다. 정약용은 여러 차례의 편지에서 책 읽는 독서의 방법과 순서만이 아니라 그 의의와 가치를 역설했다. 그는 요즘 관광지가 된 강진의 다산초당 등에서 고향으로 날아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유배 상태에 있었다.

그러자 정조도 무릎을 치면서 왜 내가 삼자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실학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박식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천재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는 사람이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유배가 풀려 고향 경기도 광주로 돌아간다.
정약용으로서는 이 주모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다. 다산기념관에는 정약용의 저서와 활동상, 거중기를 이용한 수원 화성 축조 모형 등 다양한 전시물이 있었다. 다산 생가 앞에는 화성을 지을 때 사용했던 실제 거중기의 4분의 1 크기로 제작, 전시돼 있다. 또한 정약용은 세종이 만든 연분9등법을 고제(古制)에 없고, 전분6등법을 시행하면서 연분법을 도입한 것은 조세제도를 죽도 밥도 아니게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 전남 해남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들러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는 답사 참여 소감을 나누는 토론장으로 시끌시끌했다.
In case you have found a mistake in the text, please send a message to the author by selecting the mistake and pressing Ctrl-Enter.
Comments (0)

    No comments yet

You must be logged in to comment.

Sign In / Sign Up